“나는 그냥 원래 이런 사람인 줄 알았다”
나는 항상 감정의 파도가 잔잔한 편이었다. 슬프거나 기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고,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열정적으로 몰입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오랫동안 그런 내 모습이 성격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면, 나는 20대 초반부터 기분부전장애(지속적 우울장애)를 앓고 있었다. 감정의 둔화, 만성 피로, 자신감 결여, 지속적인 무기력감은 단순한 게으름이 아니었고, 그것은 아주 조용히 나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정신과에 처음 방문한 것은 30대가 되던 해였다. 처음에는 ‘우울증’이라고 진단받을 줄 알았지만, 의사는 “당신은 기분부전장애입니다”라고 말했다. 2년 이상 지속된 우울감, 낮은 자존감, 일상 속에서의 무기력함이 특징이라는 설명을 듣고 나서야 나는 처음으로 내 상태가 ‘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치료라는 단어가 내 삶에 얼마나 늦게 들어왔는지를 자책하게 되었다. 이 글은 내가 10년 간 지속된 기분부전장애를 이겨낸 과정을 공유하는 이야기다. 감정을 인식하는 법부터, 진단을 받아들이는 용기, 치료를 지속한 시간, 그리고 결국 다시 삶에 대한 의지를 되찾기까지의 여정을 담고 있다. 이 글이 나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누군가에게 작은 희망이 되길 바란다.
진단을 받아들이기까지의 시간
기분부전장애를 처음 진단받았을 때 나는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나의 무기력과 무관심, 반복되는 자책이 성격 탓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진단을 받아들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처음 몇 주 동안은 ‘진짜로 내가 병이 있는 걸까?’라는 회의감에 시달렸다. 실제로 많은 지속적 우울장애 환자들이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는 데 수년이 걸린다고 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진단 후 약물치료를 시작했지만, 큰 변화는 바로 오지 않았다. 오히려 초기에는 부작용으로 인해 불면, 소화불량, 감정 무감각 등의 증상이 나타나 치료를 중단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정신과 의사는 ‘이 시기를 넘기면 조금씩 좋아질 것’이라고 말했고, 나는 그 말을 믿기로 했다. 기분부전장애는 장기적인 치료가 필요한 만성 우울증의 일종이기 때문에, 조급함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치료의 또 다른 축은 심리상담이었다. 처음 상담실에 들어갔을 때 나는 너무 많은 말을 숨기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는 말로 시작된 상담은 점점 내 감정을 꺼내는 연습으로 이어졌다. 상담사는 내가 자신을 너무 오랫동안 비판해왔다는 사실을 알려줬고, 그 말이 나를 울게 만들었다. 나는 처음으로 내가 나를 너무 몰랐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삶의 작은 변화에서 시작된 회복
치료 6개월 차부터 나는 미세한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다. 눈을 떴을 때 ‘오늘도 버텨야 한다’는 무거운 감정보다, ‘오늘은 어떤 하루가 될까’라는 가벼운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약물과 상담을 병행하면서 내 감정의 흐름이 조금씩 자연스러워졌고, 내 삶에 대한 태도도 바뀌기 시작했다. 회복은 거대한 변화가 아니라, 아주 작고 반복적인 습관의 축적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매일 아침 커피 한 잔을 마시며 10분간 일기 쓰기를 시작했다. 처음엔 무미건조한 글뿐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내 감정이 단어로 정리되기 시작했고, 감정을 객관화하는 연습이 되었다. 또한 운동을 시작하면서 체력과 기분이 함께 좋아졌다. 우울감은 체내 에너지와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직접 체감하게 되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이라도 가볍게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내 기분은 조금씩 안정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내가 ‘나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전의 나는 나의 우울함을 비난했지만, 이제는 그 감정을 하나의 신호로 받아들이고, 필요할 땐 스스로에게 휴식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정신건강 회복의 핵심이었다. 기분부전장애는 단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패턴을 새롭게 재구성하면서 이겨내야 하는 싸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나에게 갇히지 않는다
지금의 나는 완벽하게 낫지는 않았다. 가끔은 여전히 기분이 가라앉는 날도 있고, 아무 이유 없이 무기력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감정이 나를 삼키게 두지 않는다. 나는 그 감정을 ‘지나갈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10년 간 지속된 기분부전장애를 이겨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정신질환을 이겨냈다는 말은 단순한 승리의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살아내겠다는 결심의 연속이다. 내가 겪은 우울증 극복 사례는 극적인 반전이나 특별한 계기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매일매일 무너진 마음을 조금씩 다시 일으켜 세우는 과정, 그리고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훈련이었을 뿐이다. 이제 나는 나의 경험을 숨기지 않는다. 정신과에 다닌다고 말하는 것도, 약을 복용한 적이 있다고 밝히는 것도 더 이상 부끄럽지 않다. 오히려 그런 경험이 누군가에게 ‘나도 치료받아도 괜찮구나’라는 용기를 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이겨낸 이유일 것이다. 기분부전장애는 이겨낼 수 있는 병이며, 그 여정은 고통스럽지만 충분히 가치 있다. 당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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